밤이 낮을 밝히듯
이나라(이미지문화연구자)
“선잠을 잤다. 처음에 그것은 취기와도 같았다. 잠이 들면서, 나는 세상의 견고함이 잠의 가벼움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조르주 바타유, 『불가능』 중에서
박미라가 열었던 개인전의 타이틀이기도 한 박미라의 흑백 아크릴 드로잉 〈검은 산책〉은 대체로 ‘빈 틈 없는’ 마음의 풍경이라 할 박미라의 그림 중 예외적으로 텅 빈 풍경을 담고 있는 그림이다. 그림 속에서 구멍 하나가 크게 입을 벌리고 있다. 배후에 펼쳐진 세계가 돌 무더기 사이로 난 이 검은 구멍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아니면 세계는 이 구멍에서 거슬러 태어났을 것이다. 박미라의 세계는 방향, 정체, 명암, 구조의 뒤바뀜 속에서 태어난다.
박미라의 흑백 드로잉은 차별 없는 공간을 조성한다. 박미라는 연극성과 인간 형태론을 폄하했던 모더니즘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인간과 동물, 자연과 문화, 날짐승과 포유류, 사람의 집 안을 자유롭게 오가는 동물과 사람의 꿈 속에 출몰하는 동물, 생물과 무생물, 온 몸과 잘린 몸, 사실의 모습과 상상의 광경이 이곳에 차별 없이 초대되고, 공간을 가득 채운다. ‘유사 주체’가 된 사물은 제 기능과 성격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사물, 장소, 관객과 관계를 맺는다. 머리는 땅에서 솟고, 물결은 벽에 걸리고, 구름은 단단하게 서 있다. 구멍 같은 문으로는 연체 동물의 다리가 삐쳐 나오고 사람의 다리는 나무가 된다. 이들이 ‘빈 틈 없는 마음’을 채운다. 박미라는 개인전 《막간극》(아트스페이스 보안2, 2022)에서 선보였던 〈한 여름 밤의 꿈〉이나 《페어링》(세마창고, 2023)에서 선보였던 〈달팽이 잠〉 등의 작품에서 예술 일반 혹은 회화에 대한 메타적 성찰을 선보인 바 있다. 이 중 〈한 여름 밤의 꿈〉은 로마 철학자 플리니우스가 기록했던 석공 부타데스와 딸의 이야기를 동원한다. 부타데스의 딸은 벽 위에 비친 연인의 그림자를 따라 그림을 그린다. 다음 날이면 전쟁터로 떠날 연인의 모습을 간직하려는 절망적인 몸짓이다. 박미라는 회화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이야기를 화폭에 재현하면서 연인의 얼굴 대신 오리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반면 벽 위에 비친 그림자는 인간의 형상이다. 박미라에게 그림은 지금 여기에서 사라질 존재를 이곳에 붙잡아두기 위한 작업, 부재의 ‘복원과 현존’을 위한 작업일 뿐 아니라, 이곳에 존재한 적 없는 것을 이곳에 ‘나타나게 하도록 하는’ 작업, 소망과 상상의 행위다. 오해와 착각을 규탄하는 대신 오해와 착각을 만남의 계기로 삼는 행위다. 밤은 윤곽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밤은 새로운 윤곽이 출현하는 특권적인 시간이다.
장소 역시 변신을 거듭한다. 박미라의 집은 동굴이, 동굴은 숲이, 숲은 거실이, 거실은 무대가 된다. 집, 동굴, 숲, 거실, 무대는 매번 가장자리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겹겹이 쌓이고, 뒤틀어지고, 꿰맨 벽과 문, 창은 은신처로 향하는 입구이자 엿보는 장소, 함정, 상처, 구멍이다. 고전 연극에서 네 번째 벽은 무대 위의 세계를 완성하고, 무대 안과 밖을 나누기 위해 상상되었던 가상의 벽이다. 박미라는 이와 반대로 뒤섞임 자체가 목적인 벽을 상상한다. 박미라의 벽은 가로지르기 위한 벽이고, 가로지르는 사건이 일어나는 벽이다. 전체와 부분, 안과 밖, 위와 아래, 앞과 뒤, 그늘과 빛이 이곳에서 위계 없이 섞인다. 상투적 연결을 해제한 후에야 새로운 연결, ‘페어링’이 가능할 것이다. 박미라의 형상은 새로운 페어링을 위한 경계, 사이 공간, 인터페이스에 자리를 튼다. 인간을 닮은 존재는 무대를 등지고 벽에 고개를 파묻는다. 반면 얼굴 없는 눈은 〈검고 긴 허밍〉이나 〈페어링〉 등에서처럼 벽 위에서 우리에게 시선을 던지거나 보거나 〈막간극〉의 텔레비전 모니터 안에서 혼자 끔벅인다. 박미라의 사물은 이처럼 예기치 않은 곳에서 출현하고, 막다른 곳 너머로 고개를 돌리면서 운동한다.
박미라의 드로잉은 〈스위치온〉, 〈시끄러운 유령들〉, 〈막간극〉, 〈마음 너머〉, 〈페어링〉 등의 작업에서 애니메이션으로 확장되었다. 주지하듯 애니메이션은 프레임이라는 파편을 연결하고, 프로젝션하여 운동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박미라는 〈잘려진 감각〉과 같은 작품의 제목이 고스란히 드러내듯 파편이자 모듈로서 형상을 창조하는 작가다. 박미라의 드로잉에서 신체 조각과 사물의 파편은 맥락과 결속되길 거부할 뿐 아니라, 자유롭게 반복된다. 뿌리, 줄기, 뿔, 뾰족한 것, 타래가 하나의 캔버스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캔버스에 다시 출현한다. 박미라의 애니메이션은 대체로 절단된 채 모습을 드러내는 사물이 점령한 세계에서 만들어졌다. 절단은 보통 운동의 중단을 촉발하고, 운동 기능의 손상, 마비, 상처, 죽음을 환기한다. 절단으로 만들어진 파편은 고립된 사물이다. 그러나 박미라의 드로잉 속에서 절단은 운동을 중단하는 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유령적 부산스러움, 발작, 집요한 운동을 암시한다. 물살을 헤치는 수영 선수와 그네 위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절단된 다리가 암시하는 운동을 같은 평면에 묘사했던 〈이름 없는 목차들〉을 떠올려보자. 박미라적 사물의 부산스러운 운동은 근대적 사물의 날렵한 운동이 아니다. 근대 산업사회가 발명한 동력 기계는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시공간을 축소하고, 결국 시공간의 소멸을 야기했었다. 반면 박미라의 운동은 정지와 움직임의 끝없는 연속, 가장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가장 바깥으로 이어지는 모순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운동이다. 정지의 욕망과 움직임의 욕망을 동시에 갈구하는 불가능한 운동이고, 공간을 조직하는 대신 공간의 틈을 벌리고 공간의 겹을 만드는 운동이다. 박미라의 캔버스, 벽화 드로잉과 드로잉 애니메이션이 예시하고 확장하는 운동 역시 이러한 운동일 것이다.
몽타주는 파편을 조직하는 영화적 방법을 일컫는다. 이탈리아 영화감독 파솔리니(P. P. Pasolini)는 영화의 몽타주는 죽음이 삶에 개입하듯 영화의 질료에 개입한다고 적었다. 파솔리니의 주장 속에서 몽타주는 영화 속 시간과 공간을 실재의 시간과 공간처럼 보이도록 숏과 숏을 매칭하는 연속 편집이 아니라 언어와 장면의 배치와 재배치를 통해 근심 없이 경험되는 일상적 시공간을 재구성하는 영화적 장면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뜻한다. 이때 삶의 장면은 죽음과 불안의 기미를 삭제하지 않고 포함한다. 박미라의 작업은 몽타주의 원칙에 따라 파편적 형상의 배치와 재배치를 통해 시공간을 비틀고, 의혹을 생산하며, 장면을 재구성하는 작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죽음이 삶에 개입하듯, 정지가 운동을 뒤흔들 듯, 밤이 낮을 밝히듯 작업할 것이다.
이나라는 영화, 무빙이미지, 재난 이미지, 인류학적 이미지에 대한 동시대 미학 이론을 연구하고, 동시대 이미지 작업에 대한 비평적 글쓰기를 시도한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색채 속을 걷는 사람』, 『가스냄새를 감지하다』를 우리말로 옮겼고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자크 랑시에르, 고다르, 아녜스 바르다, 크리스 마르케르 등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프랑스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완행열차를 타고 가자, 박미라의 컬트 데드 헤드 렐름으로
조주리
회화작가인 박미라가 지난 십여 년 이상 그려온 세계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의 정교함과 세밀하게 디자인된 어두움 속으로 관람객을 몰고 간다. 그가 그려낸 ‘저 세계’는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 세계'가 얼마나 안온한 것인가 하는 안도감을 선사한다. 그렇다고 그의 작업이 꼭 공포와 불안으로 점철된 세계만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박미라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점액질의 우울감을 거둬낸 자리에, 자로 잰듯한 기괴함과 정량의 기발함이 알맞게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시네마틱’(cinematic)하다고 할 수도 있는 가공할만한 화면의 밀도는 위기에 빠진 등장 인물과 갖가지 크리처들이 한데 모여있는 옹골찬 기세지만, 그것들이 모여 특정한 서사를 향해 달려 가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풍성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 보이지만 기실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다는 의미다. 시퀀스를 이루는 이미지의 파편들은 그닥 친절한 해제를 갖지 않는다. 꿈 속에서만큼은 핍진했던 장면이었지만, 깨고나면 온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런 느낌이다. 그러니, 독해는 점차 미궁에 빠진다.
오가는 시공 속에 드문드문 마주쳤던 박미라의 작품들을 떠올리며, 성급한 결론이지만 나는 그가 특정한 서사만들기에 복무하거나 회화 매체에 대한 탐구 혹은 양식 개발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만은 아닐것이라 굳게 짐작하고 있었다. 종종 그림 그리기의 출발과 과정, 종착 지점에 대해서 묻는 질문에 대하여 느슨하게 답변을 줄 뿐인 박미라의 진심을 온전히 믿어서도, 의구심을 가져서도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 자신의 세계관을 표출할 수 밖에 없는 못말리는 충동이 있고, 그 속에서 자율적인 세계관이 움트고 유기적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어느 누구도 더 그보다 더 열심히 그리라고 부채질하거나 혹은 미진함에 대해서 비난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그저, 한 세계의 현현((顯現)이자, 작업자만의 비기(秘技)다. 적확한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작가만의 ‘렐름’(realm)이다. 즉 하나의 영토이자 지대, 세계관이다. 일평생에 걸쳐 수평, 수직, 사방으로 쌓아나가는 가상적 세계를 떠올려본다. 회화로부터 홀연히 몸은 빠져나왔고, '눈'으로만 존재하는 몸체는 어디듯 여행할 수 있는 정찰대처럼 화면 바깥의 궤도에서 운동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중세 시대의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자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미물로 분하여 자신만의 ‘어트리뷰트'(Attribute), 즉 자신만의 상징을 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개미일까, 밧줄일까, 그도 아니라면 나무 사이로 보이는 개구리의 눈알일 수도 있겠다.
양식적 측면에서 박미라의 작품에는 누구든 그의 작업으로 인지할 수 있는 독특한 특징이 있고, 반대로 어떤 이들은 그것 또한 일종의 클리셰라고 간주할만한 일관된 시각성이 동시에 발현된다. 인간적 필체가 드러나는 드로잉과 음영으로 처리한 인물과 풍경의 감각은 중세풍의 종교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흑백의 세계에 존재하는 정물과 인물, 자연이 이루는 이질적 풍경은 격랑으로 가득한 불온한 세계,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는 전치(轉置, displacement)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심판과 처벌, 속박의 대상은 주로 인간이지만, 인간의 신체 또한 생명력을 상실한 파편이나 껍데기로 부유한다. 좀처럼 빈 틈을 허용하지 않는 화면의 밀도에도 불구하고, 박미라의 회화가 지나치게 무겁지 않게 다가오는 점은 ‘중심’이 없는 부력과 ‘전체’를 가정하지 않는 탈구조적 시각성에 기인한다. 아마도 20세기 초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유사하게 보아왔던 사물의 이미지나 신경증적 신체, 망상적 세계관이 조금더 현대적으로 각색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 안에 담긴 히스테리아가 그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발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극히 세속적인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 안에서 작가가 다루는 탈 억압의 기제와 미술 언어를 대리한 이미지의 탈주방식은 분명 다른 루트를 통해 모의되고, 실행되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박미라의 그림에는 작가의 국적이나 인종, 사회 문화적 계급의식과 같은 아비투스(habitus)가 대체로 결여되어 있다. 특별히 한국적이지도, 서구적이지도, 고상하지도, 천박하지도 않다. 바로 그런 점이 그의 작업을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일도 지 모른다.
그의 작업으로부터 ‘컬트’(cult)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 말이 정확히 어떤 용례로 사용되는지 신중하게 생각할 겨를 없이, 그저 컬트적이라고 느낀 바 있다. 경우에 따라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는 이 말이 적어도 예술 안에서는 '위반'을 향한 절대적 충동과 매혹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작업 속에는 춤추는 죽음의 도상과 생명을 붙잡기 위한 사투의 장면들이 동시에 쟁명한다. 연약함을 궤뚫는 날카로운 것, 어리석음을 단죄하는 단호한 존재가 있을 것 같지만, 인간계가 규정한 '사필귀정' 따위는 없을 논리 없는 세계를 '컬트'라는 말로 포획하는 일이 가능할까.
다만, 생각해 본다. 인본주의 혹은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먼 저편에서, 각자의 인격이나 인간적인 사정은 손쉽게 거세되어 버린다. 커다란 나무와 별빛, 일렁이는 파도, 어디든 기어오르는 덤불의 줄기가 오히려 지배력을 갖는다. ‘우화’라는 단어조차 사치일 정도로 인간은 어리석은 미물이요, 다가올 처분과 심판을 기다리는 속박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서 낭만주의적 자연관을 읽어낼 여지가 있다면, 모든 것을 집어삼킬 수 있는 대자연의 심판과 그 속에서 위태롭게 나부끼는 ‘반-지성’의 존재 사이의 극단적 대비에 있을 것이다. 생동하는 삶보다 위대한 것은 죽음 너머의 저쪽 언덕, 피안(彼岸)일 것이다.
박미라가 부단히 중계하는 화면, 이를 통해 증언하는 세계는 어떤 곳인가. 조금만 들여다보면 누군가에게는 훤히 보이는 작은 구멍으로, 얇은 장막 사이로, 날카로운 틈새로 저 세계가 이어진다. 그것은 오랫 동안 회화에 대한 유비였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화가의 사유에 대한 이야기였다. 또한 사물의 이데아와 그것의 모사본이 작동하는 극장의 세계, 오늘날 회화를 상품으로 간주하는 자본의 세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진동시키는 창조적 혼돈과 오염에 찬동하는 일군의 정신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작품 곳곳마다 뚫린 지점과 그것을 관통하고, 꿰맬 수 있는 도구를 심어 둔 박미라의 전술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오가며 그 둘의 평행 세계를 웅숭깊게 바라바고, 짓궂게 표현하는 일일테다. 그것이 그만의 ‘컬트 데드 헤드 렐름(realm)’일 것이다. 정말로 그런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박미라를 생각하며, 창가 가장자리에 드리워진 커튼의 얕은 주름을, 그 사이로 펼쳐진 행로를 응시한다. 렐름은 어디에나, 어떻게든 있는것.
《페어링(Pairing)》 - 미지를 향해 힘껏 미끄러지기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이 보 배
박미라 작가의 개인전 《페어링(Pairing)》은 공간과 공간, 이야기와 이야기, 의식과 무의식, 가상과 실재 사이의 연결을 시도하는 전시로 드로잉 애니메이션, 설치, 회화 등의 신작 다수로 구성된다. 박미라는 흑백 드로잉을 주 매체로 하여, 화면 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서사구조를 탐구해왔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짝을 이루는 개념의 페어링을 넘어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 연결되고 확장될 가능성에 주목한다.
‘짝을 이루다’는 뜻의 페어링(pairing)은 흔히 블루투스 연결을 일컫기도 하고, 음식 재료의 구성과 음료 또는 주류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나타낼 때도 쓰인다. 이는 신발 한 켤레가 완성형으로서 이루는 ‘짝’의 개념보다는, 무언가와 무언가가 만나 짝을 이루는 ‘상태’, 곧 연결과 비연결을 오가는 현상 자체에 주안점을 둔다. 파란색 신호를 내뿜으며 연결 대상을 찾는 블루투스의 적극적인 동작과 달리 흑과 백으로 점철된 박미라의 화면은 다소 정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가는 적막이 흐르는 흑백의 단조로움에 기초하는 한편, 화면 내 인물과 사물의 구체적인 설정을 통해 꽤나 시끌벅적한 구성을 제시하고 있다. 박미라의 작품이 줄곧 연극적 무대 구조와 비교되어 온 것 또한 대상의 위치, 서사, 맥락 등을 매우 특정적으로 설정해 온 작가의 내러티브 전개 방식과 연관된다.
작가는 새로운 이야기의 전개나 상황의 변주를 위해 구멍, 문, 틈, 뚫린 창문과 같은 요소를 활용해왔는데, 새로운 공간 혹은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을 위해 가미된 이 요소는 반대로 기존 화면이 굳게 닫혀있었음을 시사한다. 특히 연극에서 무대와 객석 사이에 존재하는 가상의 구분선을 의미하는 ‘제 4의 벽(fourth wall)’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온전히 하나의 독립된 무대로 존재하기 위해 암시된 제 4의 벽은 기존의 공간을 안정적으로 획득하면서도 물리적, 심리적 구획을 뛰어넘어 다른 차원으로 연결될 필요성 또한 포괄한다. 이 때 페어링은 안정적이고 영구적인 연결을 보장하기보다 언제 끊길지 모를 불안감 또는 이내 이어질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SeMA창고 1전시실에 들어서면 양면으로 포개어진 회화 <빈틈 없는 마음>(2023)과 <달팽이 잠>(2023)이 가장 먼저 위치한다. 수경과 수영모를 쓰고 다이빙하는 남자, 밧줄로 나무에 단단히 묶인 남녀, 화면과 화면을 잇는 실과 바늘, 그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문어 다리와 지렁이,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어금니, 망치로 그림자를 깨부수는 남자와 이를 카메라로 포착하는 자, 담배를 입에 문 남성이 그리는 그림을 유심히 지켜보는 아이와 여성, 그리고 구석진 화면의 객석에 앉아 이 모든 장면을 직관하고 있는 자에 이르기까지... 흑백을 뚫고 일제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수많은 피조물은 끝없는 복제와 증식의 굴레 안에서 복잡한 관계망을 형성해간다. 여러 방향으로 뻗어져 나가는 서사 전개가 박미라의 작품 전반에서 읽히는 특징이라고 한다면, 캔버스 일곱 폭을 가로로 길게 이어붙인 <검고 흰 허밍>(2023)에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을 읽는 듯한 감상 방식이 자연스럽게 제안된다.
무작위로 발생하는 상황의 연속은 박미라가 평면 캔버스를 넘어 드로잉 애니메이션으로 옮겨가는 계기를 낳는데, 이러한 매체의 확장은 기존의 정지된 화면에서도 포착 가능한 인물과 사물의 동세를 통해 예견해봄 직하다. 최근 2년 사이에 제작된 <사랑>, <새 출발>, <구애>, <희망>, <눈 내리는 밤>, <눈방울>, <눈치>, <장마>, <마음잡이>, <소망>, <텔레파시>, <핑퐁>은 수직으로 쌓인 세 대의 아날로그 모니터를 통해 송출된다.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으로 반복 재생되는 총 12편의 드로잉 애니메이션은 박미라가 ‘가벼운 회화의 움직임’이라 부르는 것들로, 짧게 편집된 ‘숏폼(short-form)’ 영상의 형식을 취한다. <러브세트>(2023)에도 등장한 높은 연식의 아날로그 모니터는 CG와 같은 고급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가미 없이 가장 기본적 형태로 연출된 편집, 그리고 오로지 면과 선으로 구성된 평면적 드로잉에 설득력을 더한다. 화면을 유영하는 개별 대상들은 제안된 규격 안에 충실히 머문다는 느낌보다는 무한 증식을 통해 화면 밖으로 쏟아져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백자토로 제작된 <파랑새>(2023)와 <마음 너머>(2023) 또한 정지된 화면에서 무빙 이미지로, 무빙 이미지에서 입체물로 환생하면서 끝내 자율성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상호관계는 작가가 ‘실재의 공간과 가상의 공간을 뒤섞어 혼재된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연출을 의도한 결과물이다.
박미라의 회화 드로잉은 디지털 이미지로 접할 때보다 유독 실물로 마주할 때 다른 에너지를 내뿜는데, 작품 표면의 질감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캔버스 표면의 거친 질감은 작가가 오래전 실제 건물 외벽의 벽화 작업을 하며 경험했던 벽면과의 마찰을 담아낸 것으로, 유사한 질감을 위해 캔버스에 안료를 두껍게 쌓아올려 완성되었다. 단단한 바탕면 위에 놓인 흑백 드로잉은 그래픽 일러스트와는 확연히 구분된 속성을 갖게 된다. 어쩌면 외벽을 의도한 화면은 ‘캔버스나 영상이 플레이되는 모니터 즉, 작품의 표면을 제 4의 벽으로 상정’하는 작가가 스스로 가장 먼저 넘어야 할 필요를 느낀 막이었을지도 모른다.
화면 곳곳에 설치된 덫(구멍, 문, 뚫린 창문 등)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자세히 들여다보면 덫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도상들은 문어, 빨대, 지렁이, 지네 등 하나같이 움직임이 유연한 대상이다.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 원활하면서도 손아귀에 잡아두려 한다면 이내 미끄러워 놓치게 될 것들. 이들은 이질적이고 서로 만날 수 없을 대상들 사이의 경계를 흐리고 중첩을 돕는 장치로, 박미라의 화면 구성을 작동케 하는 결정적인 조력자가 된다. 이번 전시에 짝으로 놓인 2채널 영상 <페어링>(2023), 포개진 캔버스, 마주 보는 모니터 등이 이루는 충실한 연결고리만큼이나 작품 사이사이를 비집고 나와 격렬히 깜빡이는 연결 신호를 떠올려본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 박미라의 페어링은 영구적이거나 안정적인 연결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화면 너머 무형의 대상과의 연결을 상상해보게 되는 이유다. 자, 또 다른 극의 시작이다.
Sliding all out toward the unknown
Bo Bae Lee, Curator at Seoul Museum of Art
The solo exhibition Pairing by artist Mira Park attempts to connect spaces, stories, consciousness and the unconscious, as well as the virtual and reality. The exhibition comprises a myriad of new works, including drawing animations, installations, and paintings. Mira Park predominantly employs black and white drawings to delve into narrative structures that occur simultaneously on the screen. This exhibition centers on the prospect of diverse worlds converging and expanding beyond the basic notion of pairing.
The term "pairing," signifying an arrangement resulting from the formation of pairs, is commonly used to describe Bluetooth connections and also to denote the art of combining specific food ingredients or beverages. Not limited to the concept of a complete pair, like something formed by a pair of shoes, it accentuates the "state" in which something encounters and pairs with something else, encompassing both connection and disconnection. Unlike Bluetooth, which actively seeks connections with its blue signal, Park's black-and-white screen may appear somewhat static. Nevertheless, the artist, while building upon the simplicity of black-and-white silence, presents a rather bustling composition through the precise placement of characters and objects on the screen. Park's work is frequently likened to the structure of a theatrical stage, a comparison closely tied to the artist's specific approach to narrative development, which involves the positioning, narrative, and contextual elements of the subject.
The artist has been using elements such as holes, doors, gaps, and open windows to facilitate the development of new narratives or variations of situations. These elements, added for moving into new spaces or different dimensions, conversely imply that the existing screen was a tightly closed one. In particular, the concept of the "fourth wall," signifying the imaginary boundary between the stage and the audience in the theater, reveals its presence in this context. Implied so that the stage can exist as one entirely independent space, the fourth wall also encompasses the need to transcend physical and psychological boundaries and connect to a different dimension while still securing stability within the existing space. In this context, "pairing" prompts contemplation not of a stable and enduring connection but of the uncertainty of when it might be severed and the potential for new developments that may follow.
When you step into Gallery 1 at SeMA Storage, you'll immediately come face to face with two-sided paintings, A Mind Without Gaps (2023) and Snail's Slumber (2023). These artworks portray various scenes, including a man in a diving suit and swimming cap plunging into the water, a man and a woman tightly bound to a tree with ropes, threads and needles connecting one screen to another, octopus legs and earthworms squeezing through the gaps, teeth jutting out from a tree, a man shattering shadows with a hammer while another captures it with a camera, a child and a woman intently observing a man smoking a cigarette and sketching, and someone seated in the distant corner of the screen, taking in all of the above... Through the intricate interplay of numerous elements that collectively assert their presence in black and white, they weave a complex web of relationships within the endless cycle of replication and proliferation. If we can say that the narrative development branching in various directions is a hallmark of Park's work as a whole, then in Black and White Humming (2023), which connects seven canvases horizontally, it naturally encourages a viewing approach akin to reading from left to right.
The recurring instances of random situations serve as a catalyst for Park's transition from flat canvases to drawing animations. This shift to a new medium can be foreseen through the movement of characters and objects, which is already discernible even on a static screen. Works created over the past two years, such as "Love," "Fresh Start," "Seduction," "Hope," "Snowy Night," “Eye Ball," "Nunchi," "Monsoon," "Mind Catcher," "Wish," "Telepathy," and "Ping Pong," are presented using three generations of stacked analog monitors, with a vertical orientation. These 12 short-form drawing animations, with relatively brief running times, are aptly described by Park as "the movements of lighthearted painting." Old analog monitors, also featured in Love Set (2023), imbue the composition with authenticity, relying on the most basic form, free from advanced computer graphics technologies. Rather than giving the impression of conforming to a predefined format, the individual subjects on the screen evoke an atmosphere as if they overflow beyond the screen through endless proliferation. Blue Bird (2023) and Beyond the Heart (2023), crafted in porcelain, undergo a transition from static screens to moving images and further evolve into three-dimensional objects, ultimately attaining autonomy. This interplay materializes the artist's intent to create a blended new space by intertwining real and virtual realms and the unfolding scenarios within it.
Park's pictorial drawings emit a different energy, particularly when encountered in person, as opposed to viewing them as digital images. The reason for this can be found in the texture of the artwork's surface. The rough texture of the canvas surface is a deliberate choice by the artist, aiming to capture the friction the artist experienced while working on murals on actual building facades in the past. To achieve a similar texture, she applied thick layers of pigment to the canvas. The black and white drawings placed on this sturdy background take on attributes that distinctly differentiate them from graphic illustrations. Perhaps the intention behind creating a surface reminiscent of exterior walls was for the artist to break through what could be seen as the first barrier: a treatment of the canvas or the monitor where the artwork is displayed as the "fourth wall." This may have been a necessary step for an artist who envisions a blended space where the boundary between real and virtual is blurred.
Let's take another look at the traps (holes, doors, open windows, and the like) scattered throughout the screen. Upon closer examination, the apparitions emerging between these traps, such as octopuses, straws, earthworms, and insects, are each flexible entities, seemingly elusive if one attempts to grasp them. They serve as devices that blur the boundaries between disparate and mutually unattainable entities, fostering overlap and becoming vital collaborators in Mira Park's composition of the screen. We observe the robust connections conveyed by works that function as pairs, like the two-channel video Pairing (2023), intertwined canvases, and facing monitors. Yet, our attention also turns to the connection signals that squeeze out between works, flashing vigorously. However, as previously mentioned, Park's “Pairing” doesn't ensure a permanent or stable connection. This leads us to imagine connections with intangible entities that linger on the other side of the screen. And thus, it marks the inception of yet another stage.
John Yau
In her art, Park is in touch with our collective anxieties about a future that seems to darken with each passing day.
SEOUL, South Korea — After spending a few minutes with the work in the exhibition Mira Park: Interlude at Art Space Boan 2 (August 27–September 18, 2022), I felt like Alice in Wonderland. Having wandered into a non-commercial gallery space, which I later learned is part of Boan1942 — a guesthouse, art gallery, café, and bookstore rolled into one — I became engrossed by the different liminal spaces that Park evoked in black and white paintings as large as 6 by 8 feet, ink drawings approximately 12 by 12 inches, sculptures of animal and human anatomy, such as tentacles partially buried in sand, and black and white animations, including one projected on a wall. Later, when I looked at Park’s CV, I saw that she had titled a 2015 exhibition The Rabbit Hole (at Booknomad a. space), which both confirmed my initial impressions and made me curious about alternative spaces in Korea.
In a conversation with the show’s curator, Jeonguk Choi, I learned that Art Space Boan 2 hosts exhibitions, but does not represent artists. This and a conversation with the young artist Eun Sol Kim, who is Minouk Lim’s studio assistant, suggested that there is a thriving alternative, non-commercial art scene in Korea that is very different than the pipeline of MFA to commercial gallery situation that exists in parts of the United States. Both Park and Kim, who are not represented by commercial galleries, show regularly in alternative spaces, which is almost unheard of in the United States.
Park’s paintings are essentially large drawings done in black acrylic on a white ground. Precise lines and dark areas made by a dry brush convey shading, volume, and different types of rough surfaces. Park depicts a stage-like setting populated by body parts (hearts, hands, legs), covered in sheets or masked, as well as oddly dressed individuals of different ages, creatures such as deer and swans, observers looking through telescopes or taking photographs, and numerous participants, many of whom are engaged in inexplicable activities: a barefoot young woman dragging a boulder; a uniformed figure sweeping up what appear to be paper stars. The architectural setting of each scene is different, as if to say that you cannot step into the same dream twice.
I thought of the observers in the paintings as surrogate viewers and the individuals whose faces are unseen as the limits of our curiosity. How much do we want to see, in a visionary sense, and how much of the world’s commonplace reality can we actually look at without turning away? Fairy tale tropes and the disturbing sights of everyday commingle.
We have fallen down a rabbit hole into a world that we witness but cannot explain. The different activities occurring throughout a painting do not coalesce into an overarching narrative. Rather, Park uses her settings to seamlessly connect scenes, creatures, and characters inspired by fairy tales and writers such as Charles Perrault, the Brothers Grimm, Marie-Catherine d’Aulnoy (who coined the term “fairy tales”), and many others not known in the West, along with Surrealist artists (for instance, René Magritte), early Renaissance painters such as Pisanello and his masterpiece “The Vision of Saint Eustace” (1438-1442), movies and television — artworks and mediums that transport the viewer to another domain. The presence of modern devices in Park’s work helps situate her scenes in our contemporary world.
The sinister and miraculous occur simultaneously in Park’s fully realized, imagined worlds. In the drawing animation “Interlude” (2022), a 4-minute 20-second video is projected on one gallery wall above “Cut Off Senses,” a sculptural installation consisting of identifiable and unidentifiable ceramic body parts partially buried in a bed of sand. Are these body parts remnants of an unknown catastrophe? How does this work link with the video playing above it? At the beginning of “Interlude,” which has an immersive soundtrack by the composer/sound artist Hyemin Seo, a curtain rises on a field of black lines, which is followed by a barren landscape littered with broken televisions, large blinking eyes embedded in the ground, and candles with swaying flames. The scene zeroes in on the television in the center of this landscape, its screen projecting moving black lines, signaling it is on the fritz. Soon its screen fills the entire view and transforms into a watery world in which the faces of two women float, eyes closed. Ducks and lily pads surround the faces. Eventually everything drifts out of the frame, leaving only the water, which slowly fills with different-sized rocks. Snakes enter from the edges, linger briefly, and then leave. These and the episodes that follow seem linked, but not necessarily logical nor decipherable.
The rising curtain and television we enter suggest thresholds we have crossed. Have we left reality or are we entering a heightened version of it? What is this other world that greets us? Park’s work raises questions the viewer is unable to answer. Is the watery world meant to be the unconscious, the place of dreaming? Or is it evidence of a deluge that has flooded the world? Do the two dreaming women signify a desire to break the patriarchal constraints governing the world’s various societies? Asking these and other questions pulls us deeper and deeper into the artist’s world without offering an answer or key. This is what I found so powerful and convincing about the work. Park is in touch with our collective anxieties about a future that seems to darken with each passing day.
박미라는 우리가 어떤 꿈을 꾸는지 알고 있다.
존 야우
박미라 작가의 작업은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더 어두워져 가는 것만 같은 미래에 대한 집단적 불안을 건든다.
서울, 대한민국 __아트 스페이스 보안 2에서 열린 박미라 작가의 “막간극(Interlude)”(2022년 8월 27일-9월 18일) 전시를 보다 한순간 마치 내가 원더랜드에 들어온 앨리스가 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전시가 열린 이 비상업 갤러리가 게스트하우스, 아트 갤러리, 카페, 책방으로 이루어진 복합문화공간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전시 공간을 부유하듯 걷다 보면 박미라 작가가 그린 183 x 244cm의 흑백 페인팅, 30x30cm의 잉크 드로잉, 모래에 일부가 묻힌 촉수와 같이 동물과 인간 해부를 보여주는 조각들, 한쪽 벽에 프로젝터로 상영되는 흑백 애니메이션 등의 작업을 마주하게 된다. 그때마다 각각의 작업이 구축하는 중간지대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박미라 작가 이력에서 2015년 북노마드 아트 스페이스에서 열린 “래빗홀"이라는 전시의 제목을 보고 내가 이 전시에서 느꼈던 첫인상이 정확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한국의 대안공간들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겼다.
이 전시의 큐레이터 최정욱과 대화를 통해 아트 스페이스 보안 2라는 공간은 전시를 개최하지만, 전속 시스템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신진 작가이자 임민욱 작가의 스튜디오 어시스턴트인 김은솔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한국에서 대안적인 비상업 아트씬이 번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 MFA 석사 과정에서 상업 갤러리로 이어지는 미국의 아트씬의 공식과 같은 파이프라인과는 매우 다른 형식이다. 박미라 작가와 김은솔 작가는 현재 상업 갤러리 소속이 아니며, 대안 공간에서 꾸준하게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이런 케이스는 미국에서는 매우 드물다.
박미라의 페인팅은 본질적으로는 흰 배경에 검정 아크릴로 그려진 커다란 드로잉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른 붓으로 그린 섬세한 선과 어두운 부분들은 명암, 양감, 다양한 거친 표면의 질감을 표현한다. 박미라 작가는 신체의 부분들(심장, 손, 다리)이 종이나 마스크 등으로 가려진 채 놓인 무대 연출과 같은 상황들,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 혹은 사슴과 백조 같은 생물들이 비전형적인 의상을 입은 모습, 구경꾼들이 망원경으로 무언가를 보거나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설명할 수 없는 활동을 하는 다양한 참여자들 등을 그린다. 설명할 수 없는 활동이라 하면, 맨발의 젊은 여자가 돌덩어리를 끌고 있다던가,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종이 별과 같은 것을 쓸고 있다든가 하는 일을 말한다. 각 장면의 건축적인 설정은 모두 다르다. 마치 똑같은 꿈을 두 번 꿀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하다.
나는 그림들 속 관객들이 대리 시청자이고, 얼굴을 볼 수 없는 인물들은 우리의 상상력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시각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얼마만큼을 보고자 하는가? 그리고 실제 현실에서 우리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직면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얼마만큼인가? 동화 속 자주 등장하는 기호들과 일상 속 불편한 장면들이 뒤섞인다. 우리는 우리가 목도하고 있지만 형언할 수는 없는 세상으로 통하는 토끼굴에 굴러떨어진 것이다.
한 페인팅 안에서 일어나는 각각 다른 사건들은 하나의 통일된 내러티브로 수렴하지 않는다. 박미라 작가는 동화, 샤를 페로, 그림 형제, 들누아 백작부인(‘fairy tale’이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과 같은 작가들 외에도 서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를테면 르네 마그리트), 걸작 “성 유스티스의 비전(1438-1442)”을 그린 피사넬로과 같은 예술가들과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영감을 받는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관객을 다른 차원으로 이끄는 예술작업과 매체라는 점이다. 이런 영감들을 기반으로 박미라 작가는 장면, 생명체, 캐릭터를 만들어 그녀가 설계한 무대에 매끈하게 엮어 낸다. 박미라 작가의 작업 속 등장하는 현대적 디바이스는 작가가 만드는 장면들에 동시대성을 부여한다.
박미라 작가가 오롯이 구현한 상상 속의 세계에서는 악하면서도 기적적인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 4분 20초 길이의 드로잉 애니메이션 작업인 “막간극(2022)”은 “잘려진 감각들”이라는 조각 설치 위로 상영된다. 이 조각 설치에는 세라믹 신체 토막들이 모래에 묻혀 있는데, 그 부위를 특정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혼재되어 있다. 이 신체의 파편들은 어떤 재앙의 잔재일까? 이 조각 설치는 그 위에 드리워진 비디오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막간극"의 도입부에 작곡가이자 사운드 아티스트인 서혜민이 만든 사운드트랙이 관객을 빨아들인다. 검은 선의 들판 위로 커튼이 올라간다. 이윽고 부서진 텔레비전이 이곳저곳 흩어진 황량한 풍경, 바닥에 박힌 커다란 눈이 깜빡이는 모습, 불꽃이 일렁이는 초로 이어진다. 장면은 중앙에 놓인 텔레비전 스크린에는 기계가 고장 났음을 보여주는 검은 움직이는 선들이 틀어져 있다. 전체 씬은 그 텔레비전 스크린 속으로 점점 들어간다. 전체 화면을 가득 채우고 나면 스크린은 물이 가득한 세상으로 변하고 두 여자가 눈을 감은 채 둥둥 떠다닌다. 얼굴 주위를 오리와 연잎이 감싼다. 모든 것들이 프레임 밖으로 떠내려가고 나면 물만이 남고, 그 물을 다양한 크기의 돌들이 채운다. 가장자리에서 뱀들이 기어 나와 잠깐 머무르고, 떠나간다. 이 씬들과 그 이후 씬들은 유기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 유기성은 논리적이거나 해독할 수 있는 류의 것은 아니다.
걷혀 올라가는 커튼과 우리가 들어가는 텔레비전은 우리가 통과하는 경계선을 암시한다. 과연 우리가 현실을 벗어난 걸까 아니면 더 증강된 버전의 현실로 들어선 걸까? 우리를 맞이하는 다른 세계는 무엇인가? 박미라 작가의 작품은 관객에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영상 속 물의 세계는 우리가 꿈을 꾸는 무의식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휩쓴 대홍수의 증거인가? 꿈을 꾸는 두 여인들은 세상의 곳곳을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적인 구속을 깨고자 하는 욕망을 상징하는가? 이런저런 질문들은 던지고 있자면 우리는 작가의 세계로 점점 더 깊이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세계는 그 어떤 정답도 해답도 주지 않는다. 바로 그 지점이 이 작업의 힘이자 설득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미라 작가는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더 어두워져 가는 것만 같은 미래에 대한 집단적 불안을 건든다.
최정윤(독립큐레이터)
지하철에서 내려서 계단을 올라오다가 문득 바쁜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을 구경한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통화를 하며 목적지를 향해 모두가 발 빠르게 움직인다. 무엇보다 누구 하나 튀는 색 없이 회색, 남색, 검정, 베이지 무채색의 옷을 입고 있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마스크를 끼고 있어 조용한 것은 덤이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평범할 것을 강요받으며 산다. 범주화되어 순응하며 튀지 않고 사는 것 말이다. 생존을 위해 바쁘게 살다보면 우울이나 권태에 빠질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오는 것은 어쩌면 번아웃(BURNOUT), 지치는 일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기에 먹을 것, 입을 것을 고민하며 돈을 번다. 지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동화 같은 상상력, 억압에서 자유로운 순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자면서 꿈을 꾼다. 꿈의 내용을 기억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우리는 살면서 스스로를 억압하고 억누르며 산다.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아는 의식에 담아두기 힘든 부정적인 기억을 모두 무의식에 담는다.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는 익숙한 것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불안함과 공포를 느낀다. 이러한 공포감은 불쾌의 감정을 만들어내며,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복귀하면서 언캐니(UNCANNY, 두려운 낯설음)를 유발한다. 이것은 친숙하면서도 낯선 기이한 경험으로, 심리적인 공포, 불안, 고통을 야기한다. 억압의 본질은 어떤 것이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해 의식과 거리를 두게 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SURREALISM)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영향을 받아 20세기 초반 무의식의 표현을 지향했던 하나의 사조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이성에 의한 통제에서 벗어나, 심미적, 도덕적 관심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순수한 정신을 자동 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박미라의 작품도 무의식의 세계, 독특한 상상력이 발휘된 장면을 담았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박미라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밧줄로 묶인 신체 혹은 절단된 신체, 가위, 신체의 변형, 구멍 등을 자주 볼 수 있다. 먼저 변형, 절단된 신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정적 쾌를 느끼도록 한다. 흑백으로 단단하게 그려진 형태에서 우리는 일종의 공포, 잔인함과 함께 파괴에 대한 본능을 떠올릴 수 있다. 박미라는 현실에서 가져온 모티프들을 조합하고 변형하여 연극 무대와 같이 비현실적 공간을 화폭에 담는다. 시인 로트레아몽의 장편산문시 <말도로르의 노래>(1869)의 “재봉틀과 박쥐, 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듯이 아름다운”이라는 문구처럼, 순수한 정신의 세계를 받아쓰기 위해 초현실주의자들은 자동기술법을 사용했고, 우연히 어우러진 대상들의 이질성을 담는 것을 통해 현실을 뛰어넘는 또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다고 믿었다. 박미라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는 여러 장면들이 한 화면에 오밀조밀 담겨 있다. <한 여름 밤의 꿈>(2022)을 살펴보자. 오리의 얼굴을 한 사람의 그림자를 따라 한 여성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은 회화의 기원을 떠올리게 한다. 절단된 손과 발을 공중에 부유하듯 떠있고, 종이배를 타고 있는 아이, 거꾸로 매달린 까마귀, 천으로 덮인 유령 등 각기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이미지들이 커다란 캔버스를 메우고 있다. 그가 그린 대상들은 한 화면 내에서 재봉틀, 박쥐, 우산과 같이 우연히 만나, 따로 또 같이 존재한다.
박미라의 캔버스 작업의 특성 중 하나는, 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검정과 흰색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색이 모두 제거된 그의 화면은 그의 작품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이도록 한다. 그 대신 화면의 질감을 통해 또 다른 감각적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시멘트의 미디엄을 발라 벽화의 질감을 낸 것인데, 표면의 거친 특성은 세밀한 표현방식과 대조되어 날 것의 감정을 부각시킨다. 흰 바탕에 검은 색으로 그려진 것이 대부분이지만, 검은 바탕에 흰 색으로 그려진 <마음 방향 전환>과 같은 작품도 있다. 이러한 시도는 기괴하고 우울한 상상력을 더욱 강조하며, 동화와 현실 사이의 몽환적 세계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박미라의 매체 실험은 배경색의 변화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드로잉을 기반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도 하고, 애니메이션 앞에 세라믹으로 빚어 만든 오브제를 함께 전시했다. 앞서 말한 낯설은 두려움의 쉬운 예를 든다면, 죽어 있다고 생각했던 인형이 살아있는 듯 할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이 같은 감각은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되지만, <잘려진 감각>이라는 오브제를 통해 더욱 증폭된다. 절단된 신체나, 그림 안에서 자주 반복되는 대상들은 입체로 구현되어 모래 위에 놓였다. 캔버스 안에 이미지로 멈추어 있던 모티프들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임을 더했으며, 세라믹이라는 재료로 재구현 되어 실제 형상을 갖추고 관객에게 제시되었다.
공포 영화, 좀비물을 보거나, 놀이동산에 들러 유령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흔하게 느낄 수 없는 감각이 되살아나는 강렬한 경험을 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억눌려왔던 욕망은 이 같은 경험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표출되고, 또 누군가는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암울하고 우울한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조금은 대담하고, 조금은 금기시되는 것을 상상하며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것 말이다. 박미라의 작품은 그런 면에서 아이가 아닌 어른을 위한 동화이며, 현실 너머의 어떤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시작점이 된다.
현실로 가는 비현실적인 길
이선영 (미술평론가)
비/현실의 세계로 들어가며
두남재 아트센터의 개관 두번째 전시인 [비현실적 하이퍼 리얼리즘 : Over and Above]에는 현실이라는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초대작가 박미라, 이재석, 전희수의 전시 작품들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의 작품에서 현실은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이지는 않다는 것, 현실로 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참여 작가들에게 예술은 현실로 가는 유력한 길이다. 그들에게 현실은 출발이 아니라, 도달점, 즉 기지의 것이 아닌 미지의 것이다. 현실을 중시했던 사조들이 삶이 무게를 강조했다면, 삶의 중력을 거슬러 풍선처럼 붕 떠 있는 그들의 작품을 매어 놓는 유력한 현실은 그림이다. 작업량이 많은 그들에게 현실은 무엇보다도 붓을 들고 하는 일, 요컨대 그들이 가장 많이 시간을 보냈을 작업에서 찾아진다. 작업하면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지는 사람이 바로 작가다. 작가 또한 스펙터클 사회의 소비자지만, 동시에 그들은 이미지 생산자다.
생산자의 입장에 서면 아무리 가벼워 보이는 작품도 가벼울 수가 없다. 소비와 생산은 일 대 일 관계가 아니어서,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려면 어떤 도약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기는 쉬워도 팔기는 어려운 일상적 체험에서 쉽게 확인된다. 순식간에 이미지가 합성, 복제되는 시대에 그리기란 심신의 에너지가 무한 투자되는 과정이다. 그만큼 물질과 몸이 투자되었기에 결과물의 무게는 남다르다. 잘 된 작품은 어떤 있음직하지 않은 상황에도 개연성을 부여한다. 얼굴이 여럿이거나 손발이 국수 가락처럼 쭉쭉 늘어나는 인간(전희수)도, 해골들의 춤(이재석)도, 발밑 아래의 또 다른 우주(박미라) 조차도 있음직한 현실로 다가온다. 그림은 현실에서 가상의 몫이 증가할수록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을 포함한 여러 차원의 현실에 대해 설득력 있는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그들의 작업에서 회화는 밀도와 강도의 산물이다. 그것은 몰입의 조건이다. 일단 몰입이 되어야 소통도 유희도 가능하다. 정보화 사회에서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이미지들에 보이는 간극은 감쪽같이 붙여지곤 한다.
반면 작가들은 현실 그자체의 균열에 주목한다. 현실 자체가 이것저것으로 조합된 인공물이라면, 작가는 이러한 현실의 취약한 부분을 공략한다. 이들의 작품에서 혼성은 한술 더 뜨기 전략으로 행해진다. 이데올로기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이념의 기표들은 바람에 날리는 취약한 천막(이)이며, 세계는 만화의 칸처럼 구획되어 있고(전), 우리의 단단한 토대는 갑자기 푹 꺼진다(박) 그들의 세계는 백주 대낮처럼 환해서 분열적(이, 전)이거나, 어둠 속에 숨겨진 자기만의 우주에 푹 젖어(박)있다. 작품 속 서사를 이끌어 간다고 믿어지는 주체(대체로 인간으로 설정)가 산산조각 나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그러나 분열은 분열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연결을 위한 단면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이지 않다. 이들의 작품에서 유기체와 기계는 종횡무진으로 연결, 접속된다. 균열과 간극을 드러내기 위해서 먼저 현실이 호출되어야 한다. 그들이 호출한 현실은 그 묵직한 근거를 잃고 유희의 한 항목으로 (재)배치되면서 상대화된다.
작품 속 현실은 재차 인정(재인,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변형(생성)되기 위한 전제다. 가상이나 환상 또한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설득력 있다. 그들의 작품이 그만큼 환상적이라면 역설적으로 그만큼 현실적이라는 말이다. 이들에게 환상은 현실의 이면이며, 그 역도 가능하다. 환상과 현실은 극과 극으로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면서 수시로 그 경계를 넘나든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은 역동적이면서도 불안정하다. 작품들은 심층보다는 표면이 강조된다. 종이처럼 접혀지거나 펼쳐진 우주(박), 부조리한 매뉴얼로 변한 세상(이), 금방 다른 화면으로 바뀔 것 같은 이미지(전)가 그것이다. 굳이 미술사조와 비교한다면 초현실주의적이다. 이 전시의 기획자인 김기라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들은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방식의 초현실적 회화와 영상 설치를 통해, 각자와 삶과 현실을 주관적 시각에서 조명하고 해석하여 묘사한다.’고 밝힌다.
작업의 주체(동일자)가 타자의 힘에 주목하는 것은 예술의 기조였지만, 20세기의 사조로서 초현실주의는 영화나 사진, 도시적 현실 같은 이전 시대에는 없었던 매체 및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타자를 호출하고 대화했기에 더욱 중요하다. 초현실주의는 한번 유행하고 지나간 사조가 아니다. 이번 전시는 회화라는 고색창연한 매체가 주가 되긴 하지만,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걸맞는 초현실주의로 업그레이드 된 작품들이라는 특징이 있다. 시인이자 초현실주의를 이끈 이론가 앙드레 브르통은 꿈과 무의식의 존재를 부각시킨 프로이트로부터 영감 받아서, ‘꿈과 현실이라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상반되는 두 가지 상태가 향후에는 초현실이라는 절대적 현실 안에서 화합되리라’고 믿는다. 앙드레 브르통에게 현실이란 ‘생명과 죽음, 현실과 환상, 과거와 미래, 전달 가능과 전달 불가능, 높이와 깊이가 모순으로 보이기를 그치는 마음의 어떤 지점’을 말한다.
초현실주의자의 비전에 의하면, 우리가 전부로 알고 있는 일상적 현실은 다른 차원이 보태져서 무한대로 확장되는 것이다. 21세기에 현실은 미디어 기기의 발달로 더욱 복잡해졌다. 기기의 발달은 고성능뿐 아니라 그것이 편재한다는 것에 있다. 분열하는 육체 이미지 가운데 특히 눈(目)이 많은 것(전, 박)은 보고 보이는 관계의 망으로 얽힌 현실에 가상의 몫이 커진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질서이자 생산, 그리고 억압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진 상징적 우주에 대한 풍자(이)도 빠지지 않는다. 초현실주의 선언문에는 ‘인간들에게 그들의 사고의 나약성과 또 그들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허황된 대지 위에 그들의 흔들거리는 집을 구축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는 항목이 있다. 초현실주의자에게 ‘우리의 관념은 물 위에 떠 있는 낙엽 같은 것’(앙리 베르그송)이다. 초현실주의는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과의 관계를 작품의 전면에 놓았던 사조인데다가 당시에 이미 사진과 영상이 가세해 있던 시대인지라 어느 사조보다도 동시대적으로 느껴진다.
초현실주의는 시공간적 거리감 또한 잘 활용하기에 더욱 그렇다. 거리두기는 예술의 규칙이며, 때로 정치와 결합 된다. 초현실주의는 모더니티의 이성 중심주의에 대항하는 해방과 혁명을 외쳤다. 하지만 억압적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던 예술가들이 현실의 정치세력과의 연대했을 때는 종종 배반으로 귀결되곤 했다. 현대의 작가에게는 정치와 예술 간의 불화에 대한 경험치가 있다.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의 세대는 인터넷이 여러 기기를 통해 편재화된 시대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기에, ‘현실’의 양상은 사뭇 다르다. 무기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이재석의 작품은 전쟁과 경쟁으로 점철된 죽음의 문화를 다룬다. 그림을 배우기 전에 만화나 오락을 접한 전희수 세대에게 모태 언어는 하위문화나 대중문화에 있다. 박미라는 현실로부터 수집한 단편들로 자기만의 잔혹한 동화를 쓴다. 작품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대안의 현실은 대량소비 문화로 이루어진 우리의 일상이 유일한 현실이 아님을 알려준다.
두남재 아트센터의 개관 두번째 전시인 [비현실적 하이퍼 리얼리즘 : Over and Above]에는 현실이라는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초대작가 박미라, 이재석, 전희수의 전시 작품들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의 작품에서 현실은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이지는 않다는 것, 현실로 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참여 작가들에게 예술은 현실로 가는 유력한 길이다. 그들에게 현실은 출발이 아니라, 도달점, 즉 기지의 것이 아닌 미지의 것이다. 현실을 중시했던 사조들이 삶이 무게를 강조했다면, 삶의 중력을 거슬러 풍선처럼 붕 떠 있는 그들의 작품을 매어 놓는 유력한 현실은 그림이다. 작업량이 많은 그들에게 현실은 무엇보다도 붓을 들고 하는 일, 요컨대 그들이 가장 많이 시간을 보냈을 작업에서 찾아진다. 작업하면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지는 사람이 바로 작가다. 작가 또한 스펙터클 사회의 소비자지만, 동시에 그들은 이미지 생산자다.
생산자의 입장에 서면 아무리 가벼워 보이는 작품도 가벼울 수가 없다. 소비와 생산은 일 대 일 관계가 아니어서,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려면 어떤 도약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기는 쉬워도 팔기는 어려운 일상적 체험에서 쉽게 확인된다. 순식간에 이미지가 합성, 복제되는 시대에 그리기란 심신의 에너지가 무한 투자되는 과정이다. 그만큼 물질과 몸이 투자되었기에 결과물의 무게는 남다르다. 잘 된 작품은 어떤 있음직하지 않은 상황에도 개연성을 부여한다. 얼굴이 여럿이거나 손발이 국수 가락처럼 쭉쭉 늘어나는 인간(전희수)도, 해골들의 춤(이재석)도, 발밑 아래의 또 다른 우주(박미라) 조차도 있음직한 현실로 다가온다. 그림은 현실에서 가상의 몫이 증가할수록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을 포함한 여러 차원의 현실에 대해 설득력 있는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그들의 작업에서 회화는 밀도와 강도의 산물이다. 그것은 몰입의 조건이다. 일단 몰입이 되어야 소통도 유희도 가능하다. 정보화 사회에서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이미지들에 보이는 간극은 감쪽같이 붙여지곤 한다.
반면 작가들은 현실 그자체의 균열에 주목한다. 현실 자체가 이것저것으로 조합된 인공물이라면, 작가는 이러한 현실의 취약한 부분을 공략한다. 이들의 작품에서 혼성은 한술 더 뜨기 전략으로 행해진다. 이데올로기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이념의 기표들은 바람에 날리는 취약한 천막(이)이며, 세계는 만화의 칸처럼 구획되어 있고(전), 우리의 단단한 토대는 갑자기 푹 꺼진다(박) 그들의 세계는 백주 대낮처럼 환해서 분열적(이, 전)이거나, 어둠 속에 숨겨진 자기만의 우주에 푹 젖어(박)있다. 작품 속 서사를 이끌어 간다고 믿어지는 주체(대체로 인간으로 설정)가 산산조각 나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그러나 분열은 분열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연결을 위한 단면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이지 않다. 이들의 작품에서 유기체와 기계는 종횡무진으로 연결, 접속된다. 균열과 간극을 드러내기 위해서 먼저 현실이 호출되어야 한다. 그들이 호출한 현실은 그 묵직한 근거를 잃고 유희의 한 항목으로 (재)배치되면서 상대화된다.
작품 속 현실은 재차 인정(재인,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변형(생성)되기 위한 전제다. 가상이나 환상 또한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설득력 있다. 그들의 작품이 그만큼 환상적이라면 역설적으로 그만큼 현실적이라는 말이다. 이들에게 환상은 현실의 이면이며, 그 역도 가능하다. 환상과 현실은 극과 극으로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면서 수시로 그 경계를 넘나든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은 역동적이면서도 불안정하다. 작품들은 심층보다는 표면이 강조된다. 종이처럼 접혀지거나 펼쳐진 우주(박), 부조리한 매뉴얼로 변한 세상(이), 금방 다른 화면으로 바뀔 것 같은 이미지(전)가 그것이다. 굳이 미술사조와 비교한다면 초현실주의적이다. 이 전시의 기획자인 김기라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들은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방식의 초현실적 회화와 영상 설치를 통해, 각자와 삶과 현실을 주관적 시각에서 조명하고 해석하여 묘사한다.’고 밝힌다.
작업의 주체(동일자)가 타자의 힘에 주목하는 것은 예술의 기조였지만, 20세기의 사조로서 초현실주의는 영화나 사진, 도시적 현실 같은 이전 시대에는 없었던 매체 및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타자를 호출하고 대화했기에 더욱 중요하다. 초현실주의는 한번 유행하고 지나간 사조가 아니다. 이번 전시는 회화라는 고색창연한 매체가 주가 되긴 하지만,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걸맞는 초현실주의로 업그레이드 된 작품들이라는 특징이 있다. 시인이자 초현실주의를 이끈 이론가 앙드레 브르통은 꿈과 무의식의 존재를 부각시킨 프로이트로부터 영감 받아서, ‘꿈과 현실이라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상반되는 두 가지 상태가 향후에는 초현실이라는 절대적 현실 안에서 화합되리라’고 믿는다. 앙드레 브르통에게 현실이란 ‘생명과 죽음, 현실과 환상, 과거와 미래, 전달 가능과 전달 불가능, 높이와 깊이가 모순으로 보이기를 그치는 마음의 어떤 지점’을 말한다.
초현실주의자의 비전에 의하면, 우리가 전부로 알고 있는 일상적 현실은 다른 차원이 보태져서 무한대로 확장되는 것이다. 21세기에 현실은 미디어 기기의 발달로 더욱 복잡해졌다. 기기의 발달은 고성능뿐 아니라 그것이 편재한다는 것에 있다. 분열하는 육체 이미지 가운데 특히 눈(目)이 많은 것(전, 박)은 보고 보이는 관계의 망으로 얽힌 현실에 가상의 몫이 커진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질서이자 생산, 그리고 억압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진 상징적 우주에 대한 풍자(이)도 빠지지 않는다. 초현실주의 선언문에는 ‘인간들에게 그들의 사고의 나약성과 또 그들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허황된 대지 위에 그들의 흔들거리는 집을 구축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는 항목이 있다. 초현실주의자에게 ‘우리의 관념은 물 위에 떠 있는 낙엽 같은 것’(앙리 베르그송)이다. 초현실주의는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과의 관계를 작품의 전면에 놓았던 사조인데다가 당시에 이미 사진과 영상이 가세해 있던 시대인지라 어느 사조보다도 동시대적으로 느껴진다.
초현실주의는 시공간적 거리감 또한 잘 활용하기에 더욱 그렇다. 거리두기는 예술의 규칙이며, 때로 정치와 결합 된다. 초현실주의는 모더니티의 이성 중심주의에 대항하는 해방과 혁명을 외쳤다. 하지만 억압적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던 예술가들이 현실의 정치세력과의 연대했을 때는 종종 배반으로 귀결되곤 했다. 현대의 작가에게는 정치와 예술 간의 불화에 대한 경험치가 있다.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의 세대는 인터넷이 여러 기기를 통해 편재화된 시대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기에, ‘현실’의 양상은 사뭇 다르다. 무기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이재석의 작품은 전쟁과 경쟁으로 점철된 죽음의 문화를 다룬다. 그림을 배우기 전에 만화나 오락을 접한 전희수 세대에게 모태 언어는 하위문화나 대중문화에 있다. 박미라는 현실로부터 수집한 단편들로 자기만의 잔혹한 동화를 쓴다. 작품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대안의 현실은 대량소비 문화로 이루어진 우리의 일상이 유일한 현실이 아님을 알려준다.
박미라 : 경계를 넘나드는 산책
박미라는 산책을 즐겨한다.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눈에 담아온 것들을 무의식에 침전시켰다가 그림이라는 꿈으로 재생한다. 작품 [살아나는 밤]은 그러한 수집품들이 가득한 방이다. 그러한 방 또한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을 만큼 어수선하다. 여기에서 시계는 거꾸로 걸려 있고 서랍장에서는 누군가의 발이 나오고 있다. 롤러 코스터같은 구조물은 낮의 경험을 압축 재현한다. 익히 알고 있는 길도 꿈에서는 낯설게 나타난다. 작가와 관객은 미로가 되어버린 길에서 즐겁게 길을 잃는다. 낮의 노동은 밤의 유희가 된다. 그러한 우주에서는 역경을 이겨내는 전능한 존재(deus ex machina)가 있다. 가령 작품 [아홉번째 목숨]에서 침몰로부터 구해주는 거대한 손이 그것이다. 꿈은 분명 현실에서 온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조합이 환상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조합은 해석되기 힘들다. 통상적인 소통에 만족하지 못하여 예술을 하지만, 그로 인해 소통은 더 멀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작업은 도박이다.
박미라의 작품 앞에 선 관객은 의미, 해석, 소통이라는 방식을 벗어난 채 작가가 무한정 늘려 놓은 이미지의 폭주를 받아들여야 한다. 도시의 산책자에게 만남은 우연적인 것이 많다. 초현실주의 미학의 기조인 오브제나 병치같은 형식은 근대도시에서의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당시 세계의 수도 파리 이외의 장소에서 초현실주의의 탄생을 기대하기 힘들다. 도시는 한 장소에 모일 수 없는 것들을 모이게 한다. 게다가 사진이나 영화같은 신생 매체까지 더해져서 지금도 지속되는 최초의 프리미엄을 한껏 누리는 사조가 초현실주의다. 새로움을 만나려는 산책자의 여정에게 도시는 자유의 공기를 제공한다. 박미라의 작품에 눈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대개는 관찰로 그치는 산책자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현실에서는 유령처럼 투명하고 작품에서 모든 것을 풀어내는 스타일이다. 종이나 캔버스에 펜이나 잉크,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는 모노톤의 작품들은 현실을 이루는 주요한 한 차원을 삭감했다. 그것은 색이다.
작가는 2020년에 있었던 [검은 산책 Walk In The Dark] 전에서, ‘색을 뺀다는 것은 비워 놓는 것임과 동시에 공간을 채우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박미라의 흑백 톤은 원색 못지않게 풍부하다. 원래 블랙은 모든 색의 혼합 아닌가. 작가는 형태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중시한다. 꿈처럼 나열되거나 조합된 사물들은 기승전결이 명확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화면은 관객이 상상할 여지를 주는 은유적 대상들로 가득하다. 현실원리가 아닌 쾌락원리가 지배하는 우주다. 현실을 기준으로 한다면 싱크홀같은 갑작스러운 단절이 있다. 작품 [안이자 밖]에서 사슴과 고양이가 있는 바닥은 뻥 뚫려 다른 우주가 보인다. 작품 [검은 산책]에서도 산책 중 갑자기 뚫린 길바닥은 견고한 현실이 어디에 토대를 두는가에 대한 의문을 자아낸다. 작가는 ‘도시에서 벌어지는 지반 침식 현상인 싱크홀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래빗홀(토끼굴)을 연결해 가상의 이야기를 만든다’ 하지만 [연결된 시작]처럼 난데없는 구멍은 화이트홀이나 블랙홀처럼 다른 우주로 통하는 길이라는 암시가 있다.
세계를 세계들로 상대화시키면 구멍 주변의 나무는 가지들이 아니라, 뿌리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술은 단순한 현실의 모사가 아닌 대안적 현실(Alternate reality)로서의 평행우주(Parallel World)로서, 한갓된 상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시간 또한 불연속적인데, 작품 [꿰어진 시간]처럼 공간은 하나의 평면들로 인과관계 없이 나열되고 상상의 실로 꿰어진다. 병렬은 수평적일 뿐 아니라 수직적이기도 해서 [쌓여가는 위로들]에서는 여러 손들이 잘려진 채 쌓여 있다. 박미라에게도 단편은 연결을 위한 전제다. 이러한 분열적 이미지들은 ‘기관 없는 몸’이나 ‘다양체(manifold)’ 같이 정신분석을 넘어서는 현대철학의 흐름과 닿아있다. 연결은 종횡무진 계속되어야 하므로, 화면 자체는 연속성을 요구한다. 2020년의 전시 장면을 보면 모서리도 연결되는 벽화 스케일의 화면에 어디로 튈지 모를 은유적 단편들을 자유롭게 배치한다. 제목은 [어긋난 조화]인데, 조화가 대개 전체와 부분 간에 설정된 이상이라고 한다면, 부분들이 전체와 무관하게 자율적인 작품은 조화와 거리가 있는 것이다.
조화란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를 재현하는 상징적 우주의 이상일 따름이다. 박미라의 작품들은 자기만의 대안적 우주로 지배 질서에 대항한다. 물론 투쟁한다기 보다는 자기만의 우주도 충분히 리얼리티가 있다고 말한다. 자유로워 보이는 현대 사회는 이 조그만 여지를 무화시키려 하기에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는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항자가 된다. 작품 [펼쳐지고 접힌 마음]처럼 이 우주는 종잇장같이 취약하지만, 현실보다 훨씬 융통성 있는 접히고 펼쳐지는 세계다. 이 풍부한 주름의 우주는 [겹치고 뚫린] 상태다. 하지만 자기만의 질서는 광기의 특징이다. 작품 [표류기]의 탑승자들은 광인의 배를 떠올리는 총체적 난국이 있다.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제롬 보슈의 [광인들의 배]의 예를 들면서, 배에 탄 미치광이 승객들의 묘사가 있는 문학적 형식(시. 속담)들과의 연관을 지적한다. 하지만 광인들은 더 이상 세상 저편으로 떠나보내지 않고 사회가 끌어안게 되었는데, 그것이 병원, 공장, 학교, 군대 등 근현대의 각종 억압적 제도의 원형이 되는 수용소다.
푸코는 정상인을 광인과 구별하기 위해 광인을 죽음과 연결시킨 역사를 말한다; ‘머리는 이미 비어있고 곧장 두개골이 될 것이다. 광기는 이미 와 있는 죽음이다. 미치광이는 음산한 죽음의 전조를 내보임으로서 죽음의 기세를 누그러뜨린다.’ 죽음의 주제가 광기의 주제로 대체되었다는 것인데, ‘문제는 변함없이 삶의 허무지만, 이 허무는 이제 위협과 동시에 귀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외적이고 최종적인 종말로 인정되지 않고 내부로부터 실존의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형태로 체험된다’(푸코)는 것이다. 박미라의 작품에서 사형집행의 대상이 되는 고깔을 쓴 등장인물들은 살아있는 채 엄습한 죽음과 밀접하다. 작품은 이질적인 것의 병치가 주는 복잡함에 더해 사건적인 요소가 첨가된다. 화산처럼 폭발하고 홍수가 나고 매몰 처분되며 치고받고 싸우는 등 아우성친다. 거기에는 [시끄러운 유령들]이 가득하다. [나무가 되는 꿈]처럼 이 우주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과정 중의 존재들이 주인공이다. 그것들은 나무나 구름처럼 자란다. 종으로 횡으로 증식한다. ‘되기’를 통해 협소한 현실원칙을 벗어나고자 한다.
박미라의 작품 앞에 선 관객은 의미, 해석, 소통이라는 방식을 벗어난 채 작가가 무한정 늘려 놓은 이미지의 폭주를 받아들여야 한다. 도시의 산책자에게 만남은 우연적인 것이 많다. 초현실주의 미학의 기조인 오브제나 병치같은 형식은 근대도시에서의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당시 세계의 수도 파리 이외의 장소에서 초현실주의의 탄생을 기대하기 힘들다. 도시는 한 장소에 모일 수 없는 것들을 모이게 한다. 게다가 사진이나 영화같은 신생 매체까지 더해져서 지금도 지속되는 최초의 프리미엄을 한껏 누리는 사조가 초현실주의다. 새로움을 만나려는 산책자의 여정에게 도시는 자유의 공기를 제공한다. 박미라의 작품에 눈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대개는 관찰로 그치는 산책자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현실에서는 유령처럼 투명하고 작품에서 모든 것을 풀어내는 스타일이다. 종이나 캔버스에 펜이나 잉크,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는 모노톤의 작품들은 현실을 이루는 주요한 한 차원을 삭감했다. 그것은 색이다.
작가는 2020년에 있었던 [검은 산책 Walk In The Dark] 전에서, ‘색을 뺀다는 것은 비워 놓는 것임과 동시에 공간을 채우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박미라의 흑백 톤은 원색 못지않게 풍부하다. 원래 블랙은 모든 색의 혼합 아닌가. 작가는 형태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중시한다. 꿈처럼 나열되거나 조합된 사물들은 기승전결이 명확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화면은 관객이 상상할 여지를 주는 은유적 대상들로 가득하다. 현실원리가 아닌 쾌락원리가 지배하는 우주다. 현실을 기준으로 한다면 싱크홀같은 갑작스러운 단절이 있다. 작품 [안이자 밖]에서 사슴과 고양이가 있는 바닥은 뻥 뚫려 다른 우주가 보인다. 작품 [검은 산책]에서도 산책 중 갑자기 뚫린 길바닥은 견고한 현실이 어디에 토대를 두는가에 대한 의문을 자아낸다. 작가는 ‘도시에서 벌어지는 지반 침식 현상인 싱크홀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래빗홀(토끼굴)을 연결해 가상의 이야기를 만든다’ 하지만 [연결된 시작]처럼 난데없는 구멍은 화이트홀이나 블랙홀처럼 다른 우주로 통하는 길이라는 암시가 있다.
세계를 세계들로 상대화시키면 구멍 주변의 나무는 가지들이 아니라, 뿌리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술은 단순한 현실의 모사가 아닌 대안적 현실(Alternate reality)로서의 평행우주(Parallel World)로서, 한갓된 상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시간 또한 불연속적인데, 작품 [꿰어진 시간]처럼 공간은 하나의 평면들로 인과관계 없이 나열되고 상상의 실로 꿰어진다. 병렬은 수평적일 뿐 아니라 수직적이기도 해서 [쌓여가는 위로들]에서는 여러 손들이 잘려진 채 쌓여 있다. 박미라에게도 단편은 연결을 위한 전제다. 이러한 분열적 이미지들은 ‘기관 없는 몸’이나 ‘다양체(manifold)’ 같이 정신분석을 넘어서는 현대철학의 흐름과 닿아있다. 연결은 종횡무진 계속되어야 하므로, 화면 자체는 연속성을 요구한다. 2020년의 전시 장면을 보면 모서리도 연결되는 벽화 스케일의 화면에 어디로 튈지 모를 은유적 단편들을 자유롭게 배치한다. 제목은 [어긋난 조화]인데, 조화가 대개 전체와 부분 간에 설정된 이상이라고 한다면, 부분들이 전체와 무관하게 자율적인 작품은 조화와 거리가 있는 것이다.
조화란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를 재현하는 상징적 우주의 이상일 따름이다. 박미라의 작품들은 자기만의 대안적 우주로 지배 질서에 대항한다. 물론 투쟁한다기 보다는 자기만의 우주도 충분히 리얼리티가 있다고 말한다. 자유로워 보이는 현대 사회는 이 조그만 여지를 무화시키려 하기에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는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항자가 된다. 작품 [펼쳐지고 접힌 마음]처럼 이 우주는 종잇장같이 취약하지만, 현실보다 훨씬 융통성 있는 접히고 펼쳐지는 세계다. 이 풍부한 주름의 우주는 [겹치고 뚫린] 상태다. 하지만 자기만의 질서는 광기의 특징이다. 작품 [표류기]의 탑승자들은 광인의 배를 떠올리는 총체적 난국이 있다.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제롬 보슈의 [광인들의 배]의 예를 들면서, 배에 탄 미치광이 승객들의 묘사가 있는 문학적 형식(시. 속담)들과의 연관을 지적한다. 하지만 광인들은 더 이상 세상 저편으로 떠나보내지 않고 사회가 끌어안게 되었는데, 그것이 병원, 공장, 학교, 군대 등 근현대의 각종 억압적 제도의 원형이 되는 수용소다.
푸코는 정상인을 광인과 구별하기 위해 광인을 죽음과 연결시킨 역사를 말한다; ‘머리는 이미 비어있고 곧장 두개골이 될 것이다. 광기는 이미 와 있는 죽음이다. 미치광이는 음산한 죽음의 전조를 내보임으로서 죽음의 기세를 누그러뜨린다.’ 죽음의 주제가 광기의 주제로 대체되었다는 것인데, ‘문제는 변함없이 삶의 허무지만, 이 허무는 이제 위협과 동시에 귀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외적이고 최종적인 종말로 인정되지 않고 내부로부터 실존의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형태로 체험된다’(푸코)는 것이다. 박미라의 작품에서 사형집행의 대상이 되는 고깔을 쓴 등장인물들은 살아있는 채 엄습한 죽음과 밀접하다. 작품은 이질적인 것의 병치가 주는 복잡함에 더해 사건적인 요소가 첨가된다. 화산처럼 폭발하고 홍수가 나고 매몰 처분되며 치고받고 싸우는 등 아우성친다. 거기에는 [시끄러운 유령들]이 가득하다. [나무가 되는 꿈]처럼 이 우주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과정 중의 존재들이 주인공이다. 그것들은 나무나 구름처럼 자란다. 종으로 횡으로 증식한다. ‘되기’를 통해 협소한 현실원칙을 벗어나고자 한다.
자신만의 상상 속 세계를 엿보는 ‘만화-경’
류동현 (에이라운지 객원 큐레이터, 미술비평)
1817년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데이비드 브루스터가 고안한 만화경(Kaleidoscope)이라는 장난감이 있다. 색종이와 거울을 넣은 망원경처럼 생긴 경통에 눈을 대고 빙글빙글 돌리면, 거울에 반사되어 다채로운 색채무늬를 볼 수 있는 장난감이다. 어렸을 때 한번쯤은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만화경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신기함과 놀라움이 여전히 머리 속 한 켠에 각인되어 있다 이제 나이가 들어 팍팍한 현실과 지루한 일상을 겪는 요즈음, 과거 만화경 속을 보았던 색색의, 환상의 세계를 꿈꾼다. 이제는 잊혀졌지만, 이러한 만화경의 세계는 새로운 환상과 모험의 세계이자 도피와 위안의 세계를 보여주는 통로다. 경통을 움직이는 데 따라 거울에 비추는 수많은 도상은 이 세상의 변화무쌍함과 그 속에서 흥미를 찾는 우리의 바람에 다름아니다. 이러한 변화무쌍한 상상의 세계를 선보이는 두 명의 작가가 만났다. 박미라와 임현정은 자신만의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세계를 회화를 비롯한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일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그들의 작업은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통로다.
경기창작센터 입주작가, 책 출간 등 국내 미술신(art scene)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박미라는 이번 전시에서 회화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조각, 오브제 등 다양한 매체를 실험한다. 도시의 싱크홀 뉴스를 접하고 싱크홀을 통해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이른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적인 상상의 결과를 보여준 <래빗홀> 작업을 선보였던 작가는 이후 꾸준히 메르헨적인 상상 속 세계를 흑백의 색상으로 캔버스에 구현해왔다. 이번 전시에는 이러한 상상 속 세계에서 등장인물이 빠진, 공간이 주가 되는 작업을 선보였다. 작가는 연극적 공간에서 무대와 관객을 가르는 ‘네 번째 벽’인 막을 모티프로 이번 작업을 진행했다. 현실과 비현실을 가르는, 동시에 어긋난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를 막이라는 개념으로 본 것이다. <닫힌 문>은 이러한 의도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관객은 캔버스라는 막을 통해 박미라가 구체화한 상상의 세계를 맞닥뜨린다. 화면 가운데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연못 같기도 하고, 검은 구멍 같은 <검은 산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오히려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심연의 검은 막을 뚫고 도달한 다른 세계에 대해 궁금증이 피어 오른다. <말할 수 없는 비밀>에는 숲 속의 잘린 나무들 주변으로 귀와 촛불이 검은 배경으로 빛을 비춘다. 이러한 도상은 일종의 알레고리로 작동하는데, 코로나19 시대를 관통하면서 비대면을 통한 소통(혹은 뒷담화)의 부재로 생기는 오해를 귀라는 도상으로, 암울한 시대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희망을 촛불의 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팝업드로잉>은 자신의 회화에 등장했던 다양한 도상들을 작은 조각으로 모아놓았는데, 입체로 보는 박미라의 도상은 기괴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재미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새로이 선보이는 신작 <드로잉홀>은 투명아크릴판 위에 그려진 드로잉을 겹겹이 쌓아 위에서 바라보면 흡사 만화경 같은 풍경의 변화를 볼 수 있다.
난지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로, ‘OCI Young Creatives 2016’에 선정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던 임현정은 2018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약 4년 만에 2인전으로 국내 관객에게 인사한다. 미국에 있는 동안 작업에 매진하면서 국내의 그룹전을 통해 종종 소개되었지만, 꽤 많은 작업을 선보이는 것은 오랜만이다. 흡사 북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히에로니무스 보쉬나 페테르 브뢰헐의 상상력과 재기 넘치는 작업으로 주목 받았던 작가는 미국 생활의 경험을 새로운 신작과 접목한다. 먼저 6점과 2점으로 이루어진 <Strangers in a Strange World> 시리즈는 주변인의 시선으로 살던 작가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온 미국 생활을 모티프로 작업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미술관에서 열린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작가들의 작업을 조명한 전시는 작가에게 자신의 미국 이주를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우리 모두 이상한 세계에 사는 이방인들’이라는 생각에 도달한 작가는 미국에서의 경험과 풍경을 작가만의 다양한 상상 속 풍경들과 혼재시킨다. 이집트나 중동의 풍경 같은 <Somewhere>, 버킷을 뒤집어쓴 개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Stranded> 등은 기존 작업들과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작업들이다. 이후 작업의 변화가 있는데, 계기는 코로나19의 발생이었다. 코로나19의 발생은 작가의 거주지에 락다운을 가져왔고, 집안에서만 생활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작가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주변이나 여행지 등을 좀더 사실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고립된 상황의 작업실에서 작업에만 매진한 결과 <Pacifica>, <Grey Whale Cove>은 붓질이나 색상 등에서 밀도가 높아졌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자유를 느끼게 하고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작가 자신의 고립감을 해소하는 치유가 되었다. 신작 소품 <Study of Book of Hours>는 중세인들이 해야 할 일을 캘린더 형식으로 묘사한 기도서를 모티프로 코로나 시대에 작가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를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특히 화면 속 꽃들에 대한 관심은 코로나 이전에 다녀온 하와이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형형색색의 꽃들은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일종의 위로를 건넨다.
두 작가의 작업은 초현실주의 예술의 흐름 속에 위치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의식 너머의 세계를 드러내는 데 주력했던 초현실주의 예술의 흐름과는 차이가 있다. 데페이즈망이나 오토마티즘을 통한 의식의 비틀기가 아닌, 두 작가의 작업은 현실의 세계를 기반으로 또다른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현실과 상상 속 다채로운 세계가 사실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이른바 비틀기와 불일치가 아닌 연결과 화합의 세계다.
이번 전시에는 현실과 상상의 세계, 현실적이지만 현실을 벗어난 세계의 다채로운 풍경과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래서 전시 제목은 ‘만화경’이 아닌 가운데 대쉬가 들어간 ‘만화-경’이다. 관객들은 이번 전시의 작품을 통해 다채로운 만화경의 ‘만화(萬華)’일 수도, 다양한 스토리가 숨어있는 ‘만화(漫畫)’일 수도, 수많은 세계가 ‘멀티버스(multiverse)’처럼 펼쳐지는 ‘만화(萬畵)’일 수도 있는 풍’경(景)’을 엿볼 수 있다. 두 명의 작가가 선보이는 다채로운 풍경 속에서 자신만의 또다른 상상, 환상, 그리고 공감의 세계로, 그 통로를 통과해 보는 것은 어떨까. 묵직한 현실의 세계가 있지만, 다채로운 만화경 같은 상상의 세계는 바로 우리 곁에 있다. 박미라와 임현정의 작업은 우리에게 이러한 상상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만화-경’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만화-경 | 박미라,임현정 2인전 | 2022.6,21-7.2| 에이라운지 갤러리
밤의 상념(Night Thoughts)
이성휘
창밖으로 초생달이 보이는 방 안에 온갖 기물들이 꾸물꾸물거린다. 백열전구 아래로 펼쳐져 있는 테이블 위엔 천장까지 뻗은 식물의 화병과 촛대, 주전자, 이름 모를 새가 자리하고 그 사이로 물고기들이 유영 중이다. 기우뚱하게 놓여져 있는 테이블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책더미와 원뿔이다. 커다란 쥐들이 기어다니고, 뾰족한 송곳들이 튀어나온 안락의자 옆으로는 뱀이 지나다닌다. 벽쪽 선반 위의 사물들을 통해 이 방의 주인을 짐작하건데, 그는 분명 조형을 다루는 사람이리라. 또, 화분 위에 앉아 있는 부엉이처럼 밤을 지새우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리라.
<스위치 온>(2019)은 이 그림의 작가인 박미라가 지새운 밤의 풍경이다. 이 풍경은 멜랑콜리한 상념의 바다다. 불면이 일으킨 상념은 예민한 감정과 감각, 그리고 상상력을 배가시킨다. 작가는 자신을 “도시의 산책자가 되어 주변을 산책하며, 그 이면에 숨겨진 검은 그림자들을 들추어 기록하는 작업을 한다”고 설명한다. 특히 감정이 취약해지고 예민함이 가장 고조되는 ‘밤’이라는 시간을 주목했다고 말한다. 사실 밤에는 감정과 감각이 예민해지고 고조된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특히 18-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멜랑콜리가 유럽 문학을 잠식했을 때, 밤은 당시 문학의 중요한 모티프였다. 예컨대, 영국의 시인 에드워드 영이 쓴 시집 『밤의 상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밤, 흑단의 왕좌에서 일어난 암흑의 여신! 캄캄한 위엄 속에서, 이제 잠든 세계를 향해 그녀의 왕홀을 뻗는다. 침묵, 완전한 죽음! 그리고 암흑, 완전한 심연! 눈도, 듣는 귀도, 사물도 보이지 않는다. 창조는 잠이 들었다. 삶의 평범한 맥박조차 정지한 채, 자연도 멈추어 있다. 끔찍한 일시정지! 그녀의 끝에 대한 예언. 그리고 그녀의 예언이 곧 가득차게 하라. 운명! 장막을 내리라. 나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에드워드 영의 시는 당시 유럽에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의 시에 나타난 생생한 이미지들의 분출, 감정의 격렬한 표현, 밤, 죽음, 무덤과 같은 모티프는 멜랑콜리, 운명, 매혹적인 죽음과 같은 낭만주의의 테마의 시초가 되었다.
박미라의 밤 역시 멜랑콜리하다.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그의 그림은 가느다란 선으로 촘촘하게 매꾸어간 섬세한 드로잉들만큼이나 불면의 밤을 채워나간 작가의 상념들을 상기시킨다. 여러 대의 선풍기가 돌아가는 가운데 누워있는 인물은 마치 땅에 사지가 붙들린 듯 널부러져 있다. 바람이 그의 얼굴에 닿기는 할까? 들불이 붙은 듯 일렁이는 풀들이 불안하다. 그 풀들 사이로 개미들이 나타나 인물의 몸을 뒤덮을지도 모른다. 사실 작가는 개미들이 피부 위로 스멀스멀 기어오를 것만 같은 느낌에 대해서 말한 적 있다. 밤은 모든 감각이 곤두서 있는 시간이다. 저 일렁이는 풀들이 피부의 털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드로잉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는 뿔과 구멍이다. 먼저 뿔은 사슴과 같은 동물의 뿔이 되기도 하고, 물고기의 촉수가 되기도 하고, 곤충의 다리가 되기도 하고, 나뭇가지가 되기도 하고, 안락의자에 솟은 송곳이 되기도 한다. 또 사람의 손이자 장갑의 형태로도 등장한다. 총체적으로 이 뿔의 형태는 드로잉 안에서 동물, 식물, 사물을 시각적으로 얼마든지 오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모티프다. 동시에 예민함이 고조되어 있는 촉각을 암시한다. 저 장갑의 손끝을 보라. 음습한 기운이 손가락을 감싸는 느낌이 상상되지 않는가? 박미라가 그린 뿔은 한밤중에 극도로 고조되어 있는 예민함 그 자체다. 한편, 작가의 드로잉에서 구멍은 한결 같이 진한 검정색으로 표현되는데, 시각적으로는 납작한 평면 작업에 깊이감이라는 환영을 부여하고, 동시에 흑백으로 이뤄진 드로잉 그라데이션에 강약의 톤을 완성한다. 내용적으로는 창문이나 연못, 밤하늘 등 다른 세계로의 연결통로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앙상한 나무들이 빼곡한 숲 한가운데 뚫려 있는 구덩이를 그린 <연결된 시작>(2018)은 제목에서부터 다른 세계로의 연결에 대한 힌트를 담고 있다. 작가는 이 검은색에 대해서 “검은색 풍경은 빈 공간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많은 의미와 이야기들이 꽉 채워진 공간을 상징한다. 색을 뺀다는 것은 비워 놓는 것임과 동시에 공간을 채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화려한 칼라를 배제한 채 모노톤의 드로잉만으로 작업하는 박미라에게 검정색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이는 기술적으로는 펜의 강약 조절, 선의 굵기나 간격 뿐만 아니라 선을 채우지 않는 부분, 즉 흰색을 어디에 적용하고 어떻게 다루느냐까지 포함하는 문제다. 궁극적으로 드로잉 화면 위의 정서는 검정색과 흰색의 대비, 긴장 관계에 의해서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스위치 온> 작업을 보면, 벽난로와 식탁 러너, 그리고 카페트가 유난히 희다. 전체 공간에 드리워진 통일된 명암이 있더라도 이 사물들을 밝은 색조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화면은 시선의 흐름을 만들고, 그 흐름 속에 놓여 있는 기물들은 배경 속으로 뭉개지는 것이 아니라, 만약 우리가 한눈이라도 판다면, 그 사이 꿈틀거리며 움직일 것만 같아 보인다. 그 자체로 머리속에서 애니메이션을 연상케 한다.
한편, 펜을 이용한 세필 드로잉으로 밀도를 채우면서 대형 작업을 제작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박미라는 캔버스 또는 벽화 드로잉이나 애니메이션 프로젝션을 통해서 작업 스케일의 한계를 극복해내고 있다. 때문에 작가가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운 종이만을 작업의 지지체로 고집하지 않고, 합판이나 시멘트와 같은 거친 소재 위에도 드로잉을 시도하는 것은 중요해보인다. 이 거친 지지체들이 작가의 밤의 상념에 멜랑콜리 뿐만 아니라 또다른 격렬한 모티프들을 불러 일으키길 희망해본다.
드러난 풍경 아래 감춰진 구멍
안소연 (미술비평가)
안소연 (미술비평가)
스스로를 “도시의 산책자”라고 말하는 박미라는 줄곧 현실의 풍경을 바라본다. 매일매일 구축되어가는 도시의 풍 경은 일말의 멈춤도 없이 몸집을 키워내기에 바쁘다. 박미라는 그 변화가 불러일으키는 막연한 불안을 체감하면서 도, 정작 자신은 도시의 무심한 산책자임을 자처한다. 시치미 떼고 현실의 문제들을 그럴 듯하게 은폐하고 있는 도 시의 풍경이 어느 때부터인가 수상해보였지만, 그렇다고 작가는 그것을 집요하게 파헤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산책자”임을 스스로 각인시키면서 수상한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상상에 빠지기 일쑤다. 풍경을 바라보던 시선은 어느 순간 작가의 불안한 심리세계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고, 현실에서 감지된 비현실적 징후가 마 침내 보이지 않던 틈새를 서서히 벌려놓기 시작한다. 박미라는 그것을 도시 풍경 속에 감춰져있던 “구멍”으로 확신 했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 제목은 《래빗홀》이 됐다.
| 구멍, 열려있는 경계
박미라의 <구멍>(2015)은 이번 전시를 여는 하나의 입구이자 상상의 단초를 제시하는 작업이다. 전시장 바닥에 투 사된 원형 프레임 위로 2분 남짓의 애니메이션 영상이 반복 재생되고 있다. 밝은 바탕 화면에 느닷없이 작은 점 하 나가 생기더니 금세 갈라지면서 그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벌레들이 기어 나온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화면은 알 수 없는 검은 구멍 속으로 줌 인(zoom in) 하여 들어갔다가 실패한 듯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밝은 배경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결국 사건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은 채,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징후만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박미라는 그 실체 모를 징후에 주목한다. 우리에게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숱한 징후가 이미 일상이 돼 버린지 오래다. 바닥이 갈라지고 그때 생겨난 구멍으로 연기가 새어 나오고 벌레가 기어 나오지만 정작 구멍 속 실체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에 작가는, 전시가 시작되는 출발점에 서서 <구멍>을 통해 도시의 풍경과 얄팍하게 관계 맺고 있는 “징후적 현실(symptomatic reality)”을 본다.
<검은 땅>(2015)도 마찬가지다. 작가에게 “검은 땅”이란, 어쩌면 실체 없이 텅 빈 “구멍”을 지칭하는 말인지도 모 른다. 비가시적인 암흑으로 꽉 찬 텅 빈 공간이라는 말이 얼마나 모순인가만은, 박미라는 <구멍>과 마찬가지로 < 검은 땅>을 “부재의 표상”이라는 일련의 징후들로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1분짜리의 짧은 영상이 반복되고 있는 <검은 땅>에서는 뭔가 병적인 징후가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 있다. 박미라의 애니메이션에서 종종 볼 수 있었 던 간단한 모션들이 여기에도 쓰였는데, 그 반복 모션이 주는 강박이 일종의 잔상처럼 풍경 위에 각인돼 있다. 가면 을 뒤집어쓰고 낚시질 하는 사람, 허공을 향해 작동 중인 굴삭기, 전선이 뽑힌 채 깜빡이는 TV 모니터 등, 그것은 마 치 쉽게 지나치는 평범한 일상 행위들에 잠재된 비정상의 강박적 징후 같은 것이다. 이처럼 현실 곳곳에 드러난 병 적인 모순들은 하나의 징후로서, 그 밑에 감춰진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암시한다. 그것은 예외 없이 현실에 작은 파 열을 일으키는데, 라캉이 언급했던 “투케(tuché)”처럼 일종의 “외상적 지점”을 일컫는다. 박미라는 그렇게 헐거워 진 경계를 “구멍”이라 부른다. 그 구멍은 공간에서 어떤 지점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은 뚫려 있는 텅 빈 공허 이자 안과 밖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는 열린 경계라는 점에서 모호하고 이중적이다.
| 구멍 위, 구멍 아래
구멍 위, 현실의 장소에 드러난 수상한 징후들은 언제나 구멍 아래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케 한다. 사실 구멍 위나 아래나 실체가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드러난 징후이거나 감춰진 진실이거나 어차피 산책자의 무심한 시 선으로부터 한 발 물러서 있기는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하지만 산책자이기 원했던 박미라는 현실에 뭔가 엄청난 파 열이 일어났음을 목격했고, 누구도 그 실체에 다가갈 수는 없다는 것에서 강한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 그는 끝 내 실패할 일인 것을 알면서도, 구멍 아래에서 비롯된 실체 없는 공포를 상상하며 추리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산책 자이고 싶었던 작가는, 어느 순간부터 현실의 풍경을 등지고 도시의 이면을 상상하게 됐다. 그는 전시의 제목을 《래 빗홀》로 짓고, 현실의 징후적인 풍경을 가로지르면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상상케 하는 불안의 실체를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시장 한쪽 벽에 그린 약 7미터 길이의 <신세계>(2015)는 그가 쏟아낸 상상과 탐색의 결과다. 비 현실적인 풍경은 돌연변이 같은 형태들과 불완전한 파편들이 과도하게 뒤엉킨 파국을 암시한다. 그에게 현실의 풍 경은 하나의 징후일 뿐, 그 실체는 현실의 풍경을 거스르는 “구멍” 밑에 감춰 있다.
박미라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도시 곳곳에서 발생한 지반 침식 현상 “싱크홀”이 야기하는 사회적 갈등과 불안 에 주목했다. 최근 스펙터클한 도시 개발 이면에서 그것을 위협하는 재난의 원인으로 싱크홀이 발견되면서 화제가 됐다. 연거푸 불안한 징후들이 감지되면서 도시 풍경 밑에 잠복되어 있던 실체가 폭로된 것이다. 하지만 싱크홀은 말 그대로 구멍일 뿐 그것의 실체는 여전히 수수께끼 같아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세계 저 편에 존재한다. 말하자 면,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에 나오는 “토 끼굴” 같은 것이다. 현실 공간에 난 작은 구멍을 경계로, 현실을 벗어난 기이하고 불온한 세계는 산책자의 시선을 완벽히 해체해 놓는다. 애초에 구멍 아래를 빈둥거리며 걷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실을 위협하며 모든 것이 격렬하게 뒤엉킨 비현실의 세계는, 그가 상상으로 그린 <신세계>에서 보듯 아무런 길도, 서사도, 욕망을 잠재울 질 서도 없어 보인다. 마치 그것은 누군가가 꾸며낸 이야기처럼 현실에서는 부적절한 것으로 배척될 게 뻔하다.
하지만 박미라는 지루한 도시의 풍경 이면에 감춰진 은밀한 “구멍들”을 상상하면서, 오히려 현실의 부조리한 풍경 밑에 숨겨있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에 주목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구멍 드로잉I-X>(2015)은 작가가 다른 사람 들에게서 받은 허구의 “구멍 이야기”로 그린 드로잉 연작이다. 그는 구멍에 대한 타인들의 짧은 문장을 받아서 읽 고, 그 내용을 상상하며 다시 실체 없는 허구의 장면들을 종이에 옮겼다. 현실에 떠도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괴담처 럼, 타인들이 지어낸 이야기나 그가 그린 드로잉이나 비현실적인 상상에 불과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더러는 그 렇게 현실의 징후에서 파생된 일련의 자위적인 상상이야말로 우리가 갖는 불안과 공포의 실체와 더 가깝게 느껴질 때가 있다. 결국 현실의 외피가 가장 느슨해진 경계, 혹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재난으로 열려버린 경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경계의 주변을 끝없이 서성이며 배회하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망원경 같은 구조 안에 설치된 <드로잉홀>(2015)처럼, 작가는 다시 도시의 산책자가 되어 모호한 징후들과 좁은 구멍 속을 멀찍이 서서 들여다 볼 뿐인 거다.
검은 산책
신철규
여기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금지 표지판과 짙은 안개를 뚫고
이제는 꺼져버린 양초를 들고 거리를 나섭니다.
이제는 꺼져버린 양초를 들고 거리를 나섭니다.
우리는 가시철조망과 불에 탄 나무들이 둘러싼 구멍 주위에 모여 있습니다.
검은 호수와 같은 구멍에는 달이 뜨고 별이 반짝입니다.
하늘에는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검은 새들.
지상에는 기울어진 나무들.
멀리 바벨탑이 희미하게 서 있는 곳으로부터 우리는 너무 멀리 왔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구멍 안입니까, 바깥입니까.
검은 호수와 같은 구멍에는 달이 뜨고 별이 반짝입니다.
하늘에는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검은 새들.
지상에는 기울어진 나무들.
멀리 바벨탑이 희미하게 서 있는 곳으로부터 우리는 너무 멀리 왔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구멍 안입니까, 바깥입니까.
가슴에 구멍이 뚫린 사람들이 걸어옵니다.
달도 별도 없는 공중을 바라보며
우리는 불붙은 뗏목을 타고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붙은 뗏목을 타고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흘러내리는 촛농처럼 졸음이 쏟아집니다.
긴 뿔을 단 사슴이 뾰족한 뿔을 뜯고 있고
새들은 날개를 몸에 붙이고 바닥에 뒹굴고 있습니다.
긴 뿔을 단 사슴이 뾰족한 뿔을 뜯고 있고
새들은 날개를 몸에 붙이고 바닥에 뒹굴고 있습니다.
자, 이제 밧줄을 내려요.
잘린 손목들을 이어 붙여요.
저기 저 흐린 빛이 흘러나오는 구멍 속으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는 음화 속으로,
모든 것을 뱉어내는 양화 속으로.
잘린 손목들을 이어 붙여요.
저기 저 흐린 빛이 흘러나오는 구멍 속으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는 음화 속으로,
모든 것을 뱉어내는 양화 속으로.
여기로 오세요,
검은 산책은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검은 산책은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신철규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